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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도보 여행 (근대거리, 풍경, 감성)

by 경제적시간적자유 2025. 10. 21.

여행지에는 유행을 따르는 곳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 깊이가 사라지지 않는 장소도 있습니다. 군산은 후자에 가까운 도시입니다. 특히 가을, 노랗고 붉게 물든 낙엽들이 골목과 성당 옆 돌담을 감싸며, 도시 전체가 오래된 필름 사진처럼 변합니다. 초원사진관에서 시작해 히로쓰 가옥, 옛 군산세관, 미즈커피까지 이어지는 도보 여행은 단순한 관광을 넘어, 시간을 거슬러 걷는 감성적인 여행이 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근대문화가 살아 숨 쉬는 군산의 가을 도보 여행 코스를 소개합니다.

 

초원사진관: 아날로그 감성의 출발점

‘가을엔 군산’, 그 시작으로 초원사진관만큼 어울리는 곳이 있을까요? 군산의 대표적인 명소이자,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촬영지로 유명한 초원사진관은 사진을 좋아하거나 그 시절 감성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성지 같은 장소입니다.

 

사진관은 군산 근대문화유산 거리에 자리 잡고 있으며, 영화 속에서 정원(한석규)이 일했던 그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나무 간판과 낡은 셔터, 옛날 카메라와 사진 인화기 등 아날로그의 상징들이 공간 전체에 가득합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작은 전시실과 소품들이 꾸며져 있어,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줍니다.

 

낮은 햇살이 사진관 외벽에 길게 드리우는 오후 시간에는, 영화 속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어 특히 인기가 높습니다. 초원사진관 주변에는 작은 골목길과 옛 주택들이 이어져 있어, 가볍게 주변을 걸어도 좋습니다. 영화 속 감정을 천천히 되새기며, 발걸음을 옮겨보면 히로쓰 가옥이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나타납니다.

히로쓰 가옥과 옛 군산세관: 근대사의 겹겹이

초원사진관에서 도보 3분 정도면 도착하는 히로쓰 가옥은, 군산에서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일본식 주택 중 하나입니다. 1935년경, 일본인 지주였던 히로쓰 게이사브로가 지은 주택으로, 그의 경제적 위상과 당시 식민지 군산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축물입니다.

 

히로쓰 가옥은 일본 전통 건축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다다미방, 미닫이문, 정원, 흙돌담 등은 물론이고, 목조 구조와 낮은 천장이 주는 독특한 분위기까지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특히 가을에는 마당의 은행잎과 단풍이 바닥을 덮으며, 매우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합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 뒤에는 일제강점기의 상흔이 스며 있어, 이 공간이 주는 감정은 단순히 감탄에 그치지 않습니다.

가옥 내부를 둘러보면, 당시 일본인들의 생활과 사회적 위계 구조가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군산이라는 도시가 겪은 이중적인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히로쓰 가옥을 나서 도보로 5~7분 정도 걸으면, 붉은 벽돌 건물 하나가 눈에 띕니다. 바로 옛 군산세관입니다. 1908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개항 이후 군산항을 통해 유입되던 외국 물자와 조세를 관리하던 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세관 건물입니다.

옛 군산세관은 붉은 벽돌과 돔형 지붕이 어우러진 고전 유럽식 건축물로, 당대 서구 건축기술을 적용한 상징적인 건물입니다. 지금도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외부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묵직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잠시 멈춰 군산항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과거 무역이 활발하던 시절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 두 곳을 천천히 둘러보면, 군산의 근대사—자부심과 상처가 공존하는 복합적인 역사—가 피부에 와닿습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깊은 여운을 주는 장소들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미즈커피: 풍경과 감성이 머무는 공간

오후가 깊어지고, 걷는 발걸음도 조금씩 느려질 무렵이면 따뜻한 커피 한 잔이 간절해집니다. 그럴 때 가장 이상적인 장소가 바로 미즈커피입니다.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바로 옆에 위치한 미즈커피는, 옛 양옥 건물을 개조한 카페로 1층은 클래식한 인테리어와 조용한 음악, 2층은 탁 트인 창문 너머 군산항이 내려다보이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단순한 뷰 카페를 넘어, 공간 전체가 과거를 재해석한 감성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나무 테이블과 낡은 의자, 오래된 조명과 고풍스러운 그림들까지 모든 요소가 군산이라는 도시의 정서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특히 2층 창가에 앉으면, 멀리 군산항과 옛 건물들이 겹쳐져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창밖 풍경이 펼쳐집니다. 가을바람이 창문 너머로 스치고, 따뜻한 라테의 온기가 손끝을 데우는 그 순간. 여행의 정점은 그렇게 조용히 찾아옵니다.

 

미즈커피 주변에는 진포해양테마공원,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월명공원 등이 가까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여정으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이 카페는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하루의 감정을 정리하고 군산이란 도시를 조용히 기억하는 시간의 마침표 같은 곳입니다.

결론: 걷는 만큼 깊어지는 도시, 군산

군산은 소란스럽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부러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오래된 건물들과 낡은 표지판, 조용한 길과 바다 냄새 속에 조용히 이야기를 숨겨둡니다.

 

초원사진관에서 시작해 히로쓰 가옥과 군산세관, 미즈커피에 이르기까지, 이 여정은 단순한 도보 여행이 아니라 ‘기억을 따라 걷는 일’이 됩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시간이 멈춘 도시’가 아니라, ‘시간을 간직한 도시’를 만나게 됩니다.

 

가을, 어딘가로 느리게 걸으며 생각하고 싶을 때, 군산은 가장 적절한 도시입니다.